한*인니문화연구원 개원 1주년 기념음악회
(2012년9월16일 오후 16:00-18:00/ 에라스무스 홀)
‘누산따라에서 한반도까지’
음악회를 마치고.
원장님께…
아름다운 음악회였습니다.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혹은 관객이 되어 이 모든 것을 그저 즐기기만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어느 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순간은
없었어요.
두 시간 내내 청중은 숨소리를 죽여가며 오늘의 공연을 만끽했습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의 개원
1주년을 자축하는 오늘의 공연은 감탄과 탄성이 연이은… 참으로 자카르타의 한인문화를
이끄는 주인공들이 준비한 공연다웠습니다.
9월이 오면 언제나 한번쯤 되새기는 안도현 시인의 시에 멋진 인사말을 덧붙인 원장님의 시작 인사를 들으며, 저는 오늘 공연에서 아낌없이 감동을 받아안으리라 일찌감치
마음을 활짝 열어 두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듯이, 저는 오늘 이 음악회에서 우리가 저 먼 곳에 두고 온 가을이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음악회의 시작을 열어준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하리 다르소노는 저에게도 이제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종종 원장님께 듣기도 했고,
책자나 잡지에서 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엄청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연주가이고
매년 콘서트를 열기까지 한다는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그가 연주한 전쟁 영웅을 위한 노래는 그의 인생만큼이나 열정적이고 뜨거웠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함께 한 연주와 아름다운 노래는 오늘 음악회의 막을
여는 한 편의 오페라로 충분했어요..
그리고 THE SINGERS CHAMBER CHOIR의 ‘아리랑’은 아주 특별한 감동이었습니다.
외국인의 입을 통해 듣는 아리랑은 색다른 감동이 있는 법이지요. 인도네시아에 와서
가끔 아리랑을 부르는 현지인들을 보았어요. 언젠가는 찌아찌아 족의 한 남자 아이가 달밤에 부르는 아리랑을
듣고 혼자 가슴이 울컥했던 적도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한국이 같은 식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설움’으로 통하는 서로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오늘 아리랑을 들으면서 그들이 아리랑의 감정선을 아주 잘 이해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아…그리고 사만 라또둑 춤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무대였습니다. 그들의 춤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손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는 피나는 연습이
필요했을까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인 사만 가요에서 파생한 춤을 직접 내 눈으로 본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벅차오르는데, 공연을 하는 이들이 최고의 사만춤을 추는 무용수들이라니, 얼마나 보기드문 기회인지요. 무릎을 꿇은 채 열을 맞춰 오직 손 동작과 박수 소리만으로 말을 건네는 아쩨족의 사만 라또둑 춤 중 오늘 공연한 라또 자로 (Ratoeh
Jaroe)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살아가려는 이슬람의 종교 정신을 보여주는 춤이라 들었습니다.
결국 신은 우리들에게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단 한 가지 숙제를 주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신이 주신 메시지를 춤으로 전하려는 아름다운 무용수들을 직접 만났던 것입니다.
다음에 원장님을 뵙게 되면 오늘 들었던 사산도 연주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마치 캄캄한 밤 플로레스의 바닷가에서 혼자 고기를 낚는 늙은 어부의 노래 소리를 듣는
듯 했습니다… 아주 묘하고 슬픈 소리를 가진 악기였어요. 저로서는 처음
보는 악기이기도 했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가진 악기라니.. 어떤 사연으로 만들어진 악기인지 너무도 궁금합니다. 이 거대한 섬 나라에서 오직 3명만이 이 악기를 만들고 연주할 수 있다니.. 더욱 신비로웠지요.
최근에 루이스 세풀베다라는 칠레 소설가가 쓴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아마존의 엘 이딜리오에 사는 책 속의 노인은 마을에서 정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지요. 그는
오직 오두막에서 연애 소설을 읽으며 살고 싶어하지만, 정글의 맹수를 화나게 한 누군가에 의해 방해를 받아요.
결국 노인은 자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어쩌면 그 책 속에 등장하는 노인처럼 바다를 아주
잘 아는 플로레스의 한 어부가 연애소설을 읽는 대신 이 악기를 연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혼자
상상했습니다.
오늘 한국인들이 꾸며준 무대도 정말 최고였어요.
소프라노 이정임 씨는 성당에서 가끔 얼굴을 뵈었던 분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어서 그분의 노래를 지인의 집에 초청해서 들었던 행복한
기억도 가지고 있었구요. 그때 단 세 명의 관객 앞에서 긴장과 흥분을 애써 감추며 노래를 부르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미 이정임 소프라노의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대에 선 그녀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왠지 가슴을 치고 오르는 감동으로 제가
더 몸을 떨었습니다. ‘신 아리랑’도 그랬지만,
아마도 ‘그리운 금강산’
때문인 듯 합니다. ‘천문학자와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하늘을 다르게 본다’고 월터 리프먼이 그랬다는데, 그녀의 노래는 온통 그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쩌면 그날 노래를 들으며 우리가 그리워
한 것은 거대한 금강산이 아니라, 우리가 어느 곳에 두고 온 젊은 날의 꿈이거나 그 한때의 사랑은 아닐런지요….
아무튼 저는 오늘 부로 소프라노 이정임의 팬클럽 회장이 될 생각입니다.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나오며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시는 분은 덩달아 당신이 그 팬클럽의 총무가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감동은 하나로 다 모아지는 법인가 봅니다.
이제 편지를 접으려 합니다. 아버지 앙상블의 멋진 노래를 들었던 기쁨을 잊지 않으면서요. 이제 아버지
앙상블은 자카르타의 대표 중창단이 되었습니다. 일과 사업에 지친 우리의 남편들이, 아버지들이, 연인이, 무대복을 입고 관객을 바라보며 서로
눈을 맞추고 노래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른 ‘그대 눈속의 바다’는 가사만큼 이나 아름다웠습니다. 해지는 동해 바다에서 고래 고기 한 쟁반을 놓고 햄릿처럼
웃고 떠드는 남자들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였지요. 단숨에 유쾌한 박수로 박자를 맞추게 만들었던 ‘빨간 구두 아가씨’와 ‘아빠의 청춘’에 이어, 아버지 앙상블의 진가를 가늠하게 하는 ‘상록수’도 참으로 좋았습니다. 중창단을 이끄는 지휘자의 수고와 열정이 고스란히 보였지요.
제가 원래 개인적으로 남성 중창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자카르타처럼
남자들이 문화를 공유하고 스스로 즐기기 힘든 환경에서 이런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낸 그분들의 노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더 자주, 아버지 앙상블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들이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님.
미처 언급하지 못한 순서들 하나하나가 모두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공연이었습니다. 정말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저는 인도네시아에 14년을 살면서도 이렇게나 이 나라의 문화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오늘 처음 보고 만났던 인도네시아의 문화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어요. 나라가
크니만큼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오늘 음악회가 아니었으면 그 무지함조차 또 모르고 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원장님과 문화연구원 식구들의 노력에 아낌없이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참.. 오늘 사회를 보신 분도 참 훌륭하셨어요. 목소리도
좋았지만, 진행이 아주 깔끔해서 음악회의 격을 단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해 주세요.
원장님께서 낭독하셨던 ‘구월이 오면’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오늘 음악회로 원장님과 한,인니 문화연구원이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고 싶어셨는지 단박에 눈치
챌 수 있게 만드는 구절이지요. 그 싯귀를 원장님께 다시 읽어드리는 것으로 편지를 맺으려 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그대 구월이 오면 / 구월의 강가에 나가
/ 강물이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2012년 9월 채인숙 드림. (방송작가/연구원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