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가 기쁨이 되는 기적, 시찌니 마을
조 윤(JIKS 11)
전기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오지인 산골짜기 동네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무거 운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를수록 땀이 나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거, 공연한 만용인가, 아니면 값싼 동정의 대가인가? 겨우 이 정도로 힘들어하다니? 다시금 슬그머니 ‘후회’라는 말이 그림자처럼 발목을 잡으며 따라왔다. 그런데 골짜기로 들어서자 아! 갈대가 바람결에 따라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누런 갈대들이 넘실거리며 내 마음에 평화로 다가왔다. 갈대를 보니 조국, 한국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추수철의 벼를 보는 듯했다. 산을 오른 지 대략 1시간 30분, 드디어 6박 7일 동안 생활해야 할 ‘시찌니’ 마을에 도착하였다.
두 해 전, 교회에서 선교여행으로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섬으로 떠나면서 이번 일이 보통 수련회보다 더 뜻 깊은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조금은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기로 2시간이 걸려 시골의 시장터를 연상케 하는 술라웨시의 공항에 첫발을 디딘 순간, 나는 ‘후회’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이럴 수가? 이런 곳에 내가 왜? 금방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하지만 비록 내가 시저는 아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루비콘 강도 벌써 건넌 상황 아닌가? 더구나 혼자도 아닌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누구에겐가 봉사한다는, 처음 자세를 생각했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밝아졌다. 20명을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 한 팀은 적도이지만 추위가 심한 지역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내가 속한 팀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찌니’ 마을.
맨 처음 들어간 집은 그동안 말로만 들어 보았던, 짚으로 지붕을 지은 대나무 2층 초가집이었다. 1층은 그 동네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다. 2층으로 올라갈 때면 삐거덕 거리던 초가집은 생각 외로 튼튼했다. 우리들 10명을 거뜬히 감당해냈으니……. 또한 촌장 부인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코코넛으로 만든 쿠키를 쉴 새 없이 주었다. 처음에는 맛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먹을 것이 없는 우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간식이 되었다. 숙소는 마을주민들의 집에 2-3명씩 배정되었다.
내가 묵었던 집은 마을 촌장 딸의 집으로써, 그녀에게는 초등학생인 딸이 하나 있었다. 그 아이 이름은 예띠Yeti. 생각해보면, 예띠를 기쁘게 해 주려고 사진을 찍어 주고 사탕도 주고 이야기도 해 준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것 같다. 다른 꼬마들은 모르게 우리들만의 비밀(사탕, 크레파스 등을 준 일)을 만들었지만, 멀리서 온 한국 언니들과 자신이 친하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이 친구들에게 다 말해버리는 것을 보고 인도네시아 꼬마들도 우리 한국의 꼬마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해 간 크레파스와 볼펜, 스케치북 등이 그들에게는 하나같이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꼬마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더 많이 갖고 올 걸…….’하는 아쉬운 마음도 일어났다.
우리가 그곳에서 한 일 중에 그들을 기쁘게 한 것은 그들이 다니는 길을 다지는 것이었다. 다닐 때면 돌부리에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꼬마들과 여자들이 많다고 하여 우리 열 명이 모여 땅을 밟고 돌을 나르고 하니 재미있어 보였는지 동네 꼬마들이 우리와 함께 땅을 밟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땅을 밟으면서 서투른 인도네시아어로 노래도 불러주고 게임도 하고……. 그들의 웃음을 보니 우리 마음도 환해진 것 같았다. 비록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낮과 밤의 온도차가 심해서 우리 중 절반 이상은 벌써 감기와 두통으로 지쳐 있었지만.
우리가 했던 일 중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은 ‘달고나’ 만들기였다. 자카르타에서부터 갖고 온 설탕과 소다의 달짝지근한 향이 온 동네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달고나 주위로 하나 둘씩 동네 주민이 모이면서 우리에게 모두 손을 뻗었다.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디서나 똑같은 것일까? 이미 한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 더 받으려고 다른 손을 또 뻗었다. 더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남아있는 아이들의 손에도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어야했기에 그저 ‘미안하다’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달고나를 받은 아이들의 미소가 어렸을 때의 나의 모습을 기억나게 하였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방과 후 교문 앞 할아버지한테 달고나를 사 먹곤 하였다. 저들의 맛있어하는 얼굴을 보니 그때 나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고나를 만드는 동안 아이들이 심심할까봐 선교사님께서 나에게 그들과 인도네시아 식으로 인사를 해보라고 하셨다. 양쪽 뺨을 서로의 뺨에 부딪히는 인사법. 프랑스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을 받은 그 인사법을 동네 꼬마들과 하게 되었다. 남녀 간에는 할 수 없는 그 인사를 꼬마 여자아이들과 쑥스럽게 하였다. 생소하지만 아직도 어색함으로 남아 있는 그 인사법!
전기가 들어오지 못할 만큼 외진 곳에도 이슬람교는 이곳까지 위세가 대단하다. 남자들은 땅을 파거나 힘든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peci를 쓰고 다녔고 여자들은 hijab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우리에게 밝게 웃어주면서, 금방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옛날 우리나라와 같이 ‘여자는 너무 많이 알면 안 된다’는 사상이 있어서인지 문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고 또한 자신들의 모국어를 잘 알지 못했다. 모국어를 잘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만의 사투리가 있을 정도였다. 책으로만 본 1900년대의 집안에서만 있어야 했던 폐쇄적인 우리 한국 여성을 보는듯하여 안타까웠다.
봉사활동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온 동네 사람들과 보려고 동네에서 보기 어려운 DVD를 들고 갔지만 전기 배터리에 남아있던 전기마저 끊겨 보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미안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할 수 없는 순수함을 느꼈다. 하지만 DVD 시청 대신 캠프파이어 주변으로 큰 원을 그리며 손에 손을 잡고 노래 부르고 게임도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고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다른 날보다는 더 긴 까닭에 한층 즐거워하였다.
마지막 날, 동네꼬마들은 그들의 부모님이 허락한 곳까지만 같이 걸어 나왔다. 우리의 짐이 무거워 보인다며 다투어 달려들던 아이들과 보낸 일주일. 맑고 순수한 눈망울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다시 꼭 오라고 배웅하던 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비록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에는 촛불을 켠 채 살아야 하지만 외부인인 우리들에게 보여준 따뜻한 미소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 시 그곳에 가서 그 아이들과 더 뜻 깊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뒤늦게 생각나 자신에게 하는 한 마디. 후회, 그놈 겁쟁이던데. 아, 글쎄, 본체만체했더니 그 자식, 꼬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히 달아나버리고 그 자리엔 어느새 갈대물결로 출렁이는 ‘기쁨’만이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오고 있던 걸! 그러니 겁쟁이에 불과한 후회는 생각하지 말자고. 알았지?
------------------------------------ 수상소감
시찌니 마을의 아이들을 보고 배운 것이 참 많았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 마을에서 욕심도 내지 않고, 소박하게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제 모습을 부끄럽게 만들곤 했습니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려는 제가 참 부끄럽기만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가슴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그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 나 또한, 좁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색색의 크레용을 보고 갖고 싶어 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크레용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 버렸지만, 그것을 다 소중히 여기는 모습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산타클로스가 되어 더 많은 학용품을 갖고 가서 더 많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습니다. 바쁜 학교생활로 인해 그들을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로 다시 그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기행문을 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으로 감사, 감사합니다.
이번 여행으로 나의 생활을 반성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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