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니문화연구원 243회 문화탐방기
인도네시아, 과거와 미래가 함께 오는 곳
임이랑 (한*인니문화연구원 인턴, 가톨릭대학교 경제학과3 학년)
자카르타에서 보내는 나의 인턴 생활 두 달째. 무더운 나날들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속되던 중 아침 소나기가 한줄기 시원하게 지나간 날이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에서 짧은 인턴 생활을 하던 중 맞이하는 첫 문화탐방의 날. 나는 오늘 새롭게 만나게 될 인도네시아를 생각하며 소나기를 맞는 것처럼 가슴이 살짝 설레었다.
나의 첫 문화 탐방 주제는 ‘느끼는 만큼 나는 행복하다.’이다. 오색 빛깔로 나들이라도 가는 냥 차려입은 회원 분들과 룸메이트와 함께 탐방 길에 동행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탐방 장소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오늘 주제와 어우러지는 시 한편을 낭송하는 나의 목소리가 퍼져 울린다. 시와 함께 시작하는 탐방이 신선하다.
이렇게 처음 도착한 장소는 바띡박물관 내의 체험장이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바띡선생님께서 손으로 그린 밑그림이 그려진 천을 내어주신다. 우리들은 다섯 명씩 동그랗게 모여앉아 뚤리스(tulis) 체험을 한다. 인도네시아 직물의 대명사 바띡은 '점을 잇는다.'는 뜻으로 하나의 문양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하나 점을 그려나가는 고되고 한없이 느린 작업이다. 뜨거운 파라핀을 밑그림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간다. 뜨거운 파라핀을 닦아내는, 선을 따라 점을 잇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다림을 배운다. 인내를 배운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배우며 우리는 생각하는 철학자가 된다. 이렇게 파라핀의 선들을 완성시킨 후에는 직접 메라, 웅우(보라), 비루, 쪼끄랏 색으로 손수건을 염색하여 준다. 한 색 한 색 입히며 삶는 과정을 거치기까지 또 한 번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낯선 바띡 체험을 통해 문화는 습득이 아니라 체득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체험관 앞에 있는 바띡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체험 전에 보았더라면 그저 평범한 천으로 다가왔을 작품들이 완전히 새롭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래서 진리다. 다시 한 번 알수록 더 신비로운 인도네시아의 매력에 빠져든다. 바띡의 유래에 관해서는 3가지 속설이 있다. 인도로부터 바띡이 들어 왔다는 문화전파(Diffusion)의 관점이다. 그 이유는 인도의 발달된 직물기술과 함께 인도가 인도네시아의 종교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른 유래는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적 요소가 현지에 맞게 적응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보는 문화접변(acculturation)의 관점이다. 또 다른 유래는 바띡에 관련된 기술의 뿌리가 인도네시아이고 인도네시아에서 발달되었다고 보는 현지전통(The local tradition)의 관점이다. 한편 바띡 전통이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되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인도네시아 지역마다 특징적인 문양이 있고 색깔이 있다. 이것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주변 자연의 모습을 닮아있고 역사적·시대적 배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생활 문화이자 예술인 바띡을 다시 아는 흥미로운 박물관 탐방이었다.
장소를 옮겨 이동한 곳은 일제 강점기에 인도네시아에서 활약한 한국인 영화감독 허영의 묘지였다. 허영은 인도네시아 영화계의 거장으로 현재 활동하는 많은 영화감독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이름으로 조선에서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고, 일본 문화성의 직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 독립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인도네시아 독립을 기념하는 영화도 수편 만들어내었다. 시대적인 이유로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뿌리내릴 수 없었던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식어가는 심장에 영화로서 붉고 화사한 꽃을 피우려했지만 젊은 나이에 외로이 요절하게 된다. 허영, 그를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오로지 영화만을 생각했고, 영화만을 사랑했던 그의 고단했던 삶 앞에 인도네시아의 문화대로 붕아 따부르(Bunga Tabur)을 가득 뿌려드렸다. 처자식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망명 아닌 망명의 삶을 살아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들이 이 땅에는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그들은 이국의 땅, 인도네시아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오전 일정을 마치고 DESA BUMBU에서 인도네시아 식 식사를 마친 탐방 회원들은 잘란 수라바야(Jl.SURABAYA) 골동품 거리를 갔다. 이곳에서는 섬나라의 특징상 수많은 나라들과 활발한 무역 교류가 이루어졌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양한 국가들의 문화가 깃들여진 골동품들이 거리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음은 RUMAH OBAMA를 방문하였다. 인도네시아 사람보다도 피부색이 더 까만 오바마는 양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초등학교 시절 4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 시절 주인집의 작은 별채에서 살았던 오바마는, 처음 이 작은 집으로 이사 오던 날 마당에서 주저앉아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비의 꿈을 품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이긴 오바마는 지금 세계의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되었다. 편견과 외로움은 그의 어떤 꿈도 꺾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삶 안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깊은 마음을 품게 한 약이 되었으리라.
탐방 막바지에 찾은 수카르노-하타 동상. 이곳은 인도네시아의 독립 선언을 했던 수카르노의 자택이었다. 우리와 이틀이 차이가 나는 8월 17일에 인도네시아 또한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수카르노는 바로 이 자택에서 인도네시아가 독립 국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선언서를 낭독한 것이다. 이곳에 서면 국기가 멋지게 휘날리며 국기가 드높여질 때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도 같은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아픈 역사가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건축물에는 광복을 뜻하는 45와 8, 17 숫자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17개의 기둥을 세웠고 가장 높은 기둥의 높이는 8미터에 이른다.
마지막 장소는 묘비박물관이다. 가톨릭 교인들의 무덤으로 슬피 우는 여인상을 보며 삶과 죽음의 거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며, 저절로 경건하고 숭고한 마음이 들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가 함께 온다. 오늘 탐방은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인니문화 그 낯설음 속에서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행복해졌다.
짧지만 깊은 감동이었던 한*인니 문화연구원에서의 인턴 생활을 기억하며 인도네시아에서의 모든 만남이 한 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함께 오는 귀한 순간순간들로 기억되리란 걸 탐방을 마칠 무렵에 비로소 알았다.